게임은 방구석 문화였습니다. 게임에 대한 무지와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이 게임을 방구석으로 몰아넣었죠. 하지만 게임을 즐기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게임 산업이 성장하는 등 물적 토대가 갖춰지면서 게임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 같은 변화를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 게임 유래 신조어입니다. 문화는 언어를 매개로 전파되기 때문에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일상 속 신조어를 보면 당대의 문화가 보이는데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쓰는 신조어가 게임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 아셨나요? 그럼 게임 출신 신조어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드캐리
“하드캐리, 하드캐리, 하드캐리, 하드캐리”
CF송으로도 익숙한 ‘하드캐리’는 누군가 상황을 반전시킬 만큼 큰 능력을 발휘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흔히 ‘OO이 OO을 하드캐리했다’라는 식으로 쓰이는데요. 영어 hard와 carry의 합성어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빡세게 이끌었다’ 정도의 뜻입니다.
가장 근접한 말로 ‘대활약’을 들 수 있겠네요. ‘캐리했다’라고도 합니다. 하드캐리는 노래 제목, CF, 기사에 사용될 정도로 대중적인 신조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OO각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할 각이다”라는 말도 게임 출신입니다. ‘어떤 행위를 할, 어떤 일이 벌어질 적절한 상황이다’라는 뜻으로, ‘각이 나온다’, ‘각을 잡다’, ‘각을 재다’ 등으로 쓰이다가 최종적으로 ‘-각’이라는 접미사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구에서 쓰리쿠션을 칠 각도를 찾을 때 사용하던 말에서 시작됐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로 유행어가 된 건 ‘롤’의 영향이 큽니다.
당구로 시작돼 ‘포트리스’ 등 각도가 중요한 게임을 거쳐 사용되고 있는 말이지만, 현재는 각도와 크게 상관없이 특정 상황이 올 것이라고 판단되면 ‘OO각’의 형태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배그’에서는 1등을 할 만한 상황에 ‘치킨각’이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일상에서는 ‘고소각’, ‘야식각’, ‘처맞을 각’ 등 다양한 상황 속에서 응용돼 사용됩니다.
테크트리
‘OO 테크 탔다”, “망테크’ 등 어떤 코스나 길에 접어들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신조어 ‘테크’는 ‘테크트리’의 약어로 게임 출신입니다. ‘스타크래프트’ 등 실시간 전략(RTS) 장르의 게임에서 시작된 이 말은 건물을 짓고 유닛을 생산하는 기술 계통도(Tech Tree)를 의미합니다. RTS 게임에서는 특정 조건을 충족시켜 나가면서 단계별로 건물과 유닛을 뽑을 수 있는데 그 구조가 나뭇가지를 닮아 ‘테크트리’라고 합니다.
일상에서는 주로 ‘삶’, ‘인생’과 관련된 말들과 섞여 사용됩니다. ’인생 테크 잘 탔다’, ‘망테크 탔다’ 등의 형태로 자주 쓰입니다.
어그로 끌다
‘어그로를 끈다’는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행위를 말하는데요, 이 역시 게임에서 나온 말입니다. 영어로 도발, 약 오르게 하는 일을 뜻하는 ‘aggravation’에서 나온 말로 MMORPG 장르 게임에서 주로 사용됐습니다. MMORPG에서는 몬스터를 도발해서 최우선 공격 대상으로 지정되는 일을 말합니다. 이 같은 말이 현실 세계에 응용되면서 상대방의 공격을 유발하도록 도발하는 행위 나아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행위를 뜻하게 됐습니다. 응용 버전으로 ‘어그로꾼’ 등이 있습니다.
크리
흔히 ‘OO 크리’의 형태로 쓰이는 ‘크리’는 ‘크리티컬 히트’의 준말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치명타’. 평상시보다 큰 데미지를 입히는 걸 말합니다. 일상에서는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행동이나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접미사로 쓰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엄마크리’, 줄여서 ‘엄크’가 있습니다. 엄마가 등장해 게임 등 하던 일을 중단하게 된 상황을 뜻합니다. 대표 용례로 “엄크 떴다” 등이 있습니다.
되팔렘
중고 물건을 사고파는 데 익숙한 분이라면 ‘되팔렘’이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되팔렘은 물건을 사서 비싼 값에 되파는 사람이나 행위를 말합니다. 이 말은 ‘디아블로’에 등장하는 캐릭터 ‘네팔렘’과 ‘되팔이’를 합친 말인데요,
‘디아블로3’ 출시 당시 한정판을 사재기해 수 배의 가격에 되파는 사람들을 지칭하던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입에 잘 달라붙는 어감 때문일까요? 현재는 구하기 힘든 물건을 개인 소장이 아닌 비싼 가격에 되팔기 위한 목적으로 구매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밖에도 ‘너프’, ‘쿨타임’, ‘득템’ 등 다양한 게임 용어들이 일상 속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모른 채 말이죠. 게임은 비주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네 삶에 스며들어 언어 사용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문화가 돼 가고 있습니다. 이만 글을 마칠 각입니다.
이기범 블로터 기자 spirittiger@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