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보물찾기는 내 안에 잠재된 모험심을 자극하곤 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방 탈출 게임을 즐기는 심리도 비슷합니다. 숨겨진 요소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면서 끝내 방을 탈출하는 순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현실 속 ‘그 찐따 같던 내가 맞나?’ 하고요.
게임 속 ‘이스터에그(Easter egg)’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구권의 부활절 달걀 찾기 풍습에서 유래한 이스터에그는 제작자가 재미로 숨겨 놓은 메시지나 기능을 말합니다. 이스터에그를 숨기는 게임 개발자와 찾는 유저. 세계관 최강자들의 대결 같은 게임 속 이스터에그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최초의 이스터에그
이스터에그는 각종 게임과 프로그램, 책, 영화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글도 검색어 이스터에그로 유명하죠. 검색어로 ‘askew(삐딱하게)’를 입력하면 검색 화면이 기울어지며, ‘do a barrel roll(비행기를 연속 횡전해라)’을 입력하면 화면이 한 바퀴 크게 회전합니다.
최초의 이스터에그는 게임에서 나왔습니다. 1979년 출시된 ‘아타리 2600’ 용 게임 ‘어드벤처(Adventure)’가 이스터에그가 숨겨진 첫 사례로 꼽힙니다. 그래픽 어드벤처 장르로 만들어진 이 게임은 네모난 아바타를 움직여 적들을 피해 마법의 성배를 찾아 황금성에 되돌려 놓는 내용으로 구성됐습니다. 이스터에그는 미로, 다리, 열쇠가 되는 특정 픽셀 등 복잡한 단계를 거쳐 등장합니다. 이를 통과하면 비밀의 방에 도달하게 되는데, 개발자인 워렌 로비넷(Warren Robinett)의 이름이 번쩍이면서 나옵니다.
이 같은 이스터에그를 심어놓은 배경은 일종의 복수였습니다. 당시 아타리가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인수된 후, 뉴욕 임원들과 캘리포니아 개발자들 사이에서 문화적 충돌이 있었는데요. 특히 아타리 측은 경쟁사에 개발자들을 뺏기지 않기 위해 게임에서 개발자 이름을 지웠습니다. 이에 불복종하기 위해 “이 게임 내가 만들었다”라는 식의 이스터에그가 심어진 것입니다. 2018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주인공이 아타리 ‘어드벤처’를 플레이하면서 이스터에그를 찾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2017년 이보다 앞선 이스터에그가 발견됩니다. 1977년 아타리에서 출시한 비디오게임 ‘스타십 1(Starship 1)’에서는 코인을 넣는 화면에서 특정 커맨드를 입력하면 “Hi Ron!”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스타십 1’은 기네스 세계 기록에 최초의 이스터에그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코나미 커맨드
오락실 세대라면 히든 캐릭터를 고르기 위해 복잡한 커맨드를 입력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이것도 일종의 이스터에그에 해당하는데요. 코나미는 이 같은 커맨드 입력으로 유명한 개발사입니다. 코나미는 패미컴용 그라디우스를 시작으로 자사 게임에 커맨드 입력으로 등장하는 이스터에그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코나미 커맨드’로 불리는 ‘↑↑↓↓←→←→BA’를 입력하면 게임별로 다양한 효과가 등장합니다.
슈팅 게임 ‘그라디우스’ 시리즈에서는 코나미 커맨드를 입력하면 파워업 효과를 얻게 됩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이를 꼬아서, ‘그라디우스3’ 등에서는 코나미 커맨드를 입력하면 기체가 자폭합니다.
‘메탈기어 솔리드’ 시리즈에서도 코나미 커맨드가 등장합니다. ‘메탈기어 솔리드 2’에서는 게임 후반부에 스네이크와 오타콘이 복잡한 손동작을 하고 나서 포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는 코나미 커맨드를 손짓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메탈기어 솔리드 3’와 ‘메탈기어 솔리드 4’에서는 특정 보스전 중 해당 커맨드를 입력하면 적의 위치가 표시됩니다.
이스터에그가 가득한 GTA 시리즈
GTA 시리즈 역시 각종 이스터에그로 가득합니다. 특정 장소를 열심히 뒤지다 보면 외계인이나 UFO를 비롯해 귀신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 각종 영화나 게임을 패러디한 구조물들이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가장 독특한 이스터에그 중 하나는 ‘GTA 산 안드레아스’에 등장합니다. 작중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모티브로 한 캔트 다리에는 “여기엔 이스터에그가 없으니까 돌아가(There are no Easter Eggs up here. Go away)”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스터에그를 찾으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위트 있게 풀어낸 이스터에그인 셈입니다.
크리스 훌리핸의 방
닌텐도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 ‘젤다의 전설 신들의 트라이포스’에는 ‘크리스 훌리핸의 방’이라고 불리는 비밀의 방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링크(젤다 아님)가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 페가수스의 신발이나 폭탄을 이용한 넉백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데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1991년 게임 발매 이후 11년 만인 2002년에서야 발견됐습니다. 해당 방에는 대량의 루피(게임 내 재화)와 함께 “내 이름은 크리스 훌리핸이고 여기는 1급 비밀의 방이야.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라는 메시지가 출력됩니다. 사실 이 공간은 일종의 버그성 캐릭터 움직임이 발생할 때 에러를 막기 위해 마련한 조치입니다. 맵에 캐릭터가 꼈을 때 구조 장치 같은 셈이죠.
크리스 훌리핸은 실존 인물입니다. 닌텐도 미국의 자체 발간 잡지 ‘닌텐도 파워’가 1990년도에 개최한 이벤트의 당첨자인데요. 당시 닌텐도 파워는 ‘파이널판타지’에 등장하는 보스 ‘워메크’ 인증샷을 보내면 추첨을 통해 NES로 발매될 게임에 이름을 남겨주는 이벤트를 열었고, 크리스 훌리핸은 여기에 당첨돼 결국 게임 속에 남게 됐습니다. 일종의 유저 참여형 이스터에그인 셈입니다.
이 밖에도 여러 유저들이 마치 ‘원피스’를 찾는 루피처럼 게임 속 이스터에그 찾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개발자들은 유저들과 이스터에그 밀당을 즐기고 있고요. 특히 인디 게임 ‘바인딩 오브 아이작’은 현실과 게임을 넘나드는 추리 게임을 통해 숨겨진 요소를 드러내며 이스터에그의 전설로 남았습니다. 지금도 게임 속 어딘가에는 발굴되지 않은 이스터에그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스터에그가 발견되는 순간, 우리들의 가슴은 다시금 웅장해집니다.
이기범 블로터 기자 spirittiger@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