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세상에 없던 영화가 나왔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게임 ‘일랜시아’.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일랜시아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인 박윤진 씨는 버그로 접속이 불가능해진 망겜 일랜시아를 살리기 위해 친구들과 넥슨에 쳐들어가는데…
우리는 왜 일랜시아에 매달리는지, 거기엔 대체 무엇이 있는지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한때 ‘바람의 나라’나 ‘어둠의 전설’ 같은 RPG 게임에 매달렸던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며 잊고 있었던 감정들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게이머를 위한 영화를 제작한 박윤진 감독을 직접 만났다.
가장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다
“일랜시아 왜 아직 하세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반갑습니다. 크래프톤 독자들을 위해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연출한 박윤진입니다.
영화의 소재인 일랜시아는 1999년에 출시된 옛날 게임인데요. 감독님은 몇 살 때부터 게임을 플레이하신 건가요?
제가 올해 30살인데요. 11살, 2002년에 시작했어요. 월드컵 개최된 해라 정확히 기억나네요. (웃음)
2002년 당시 잘 나가는 RPG 게임이 많았는데, 왜 하필 일랜시아였을까요?
당시 인기 있었던 바람의 나라, 어둠의 전설, 아스가르드, 테일즈위버 등 이런 게임들을 다 했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일랜시아는 다시 들어가면 늘 아는 사람이 접속 중이더라고요. 몇 년 뒤에 또 생각나서 들어가 보면 다른 사람이 접속 중이고. 그러다 보니 정착하게 된 것 같아요. 사람들 때문에.
일랜시아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제가 일랜시아 유저라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제일 잘 알고, 잘 말할 수 있으니까요. 유저가 아니라면 이 소재를 선뜻 선택하지 못했겠죠. 그리고 학교 교수님이 ‘가장 궁금한 걸 찍어야 한다’고 말씀했어요. 제가 가장 궁금한 건 일랜시아였거든요. 왜 사람들이 아직 여기에 남이 있는 거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죠.
이번 영화가 대학 졸업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중앙대학교 영화과 졸업작품이에요. 처음에는 40분짜리 영화였는데, 조금씩 늘어나서 장편 영화가 됐어요. 현재 버전이 나오기까지 두 번 정도 큰 수정을 거쳤죠.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며 9년 동안 영화 공부를 했어요. 사실 영화로 진로를 명확하게 정한 건 아니고,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어요. 드라마, 웹툰, 웹 소설, 게임 시나리오 등 관심 있는 분야가 많죠. 어쩌다 보니 영화를 계속 찍게 됐어요.
영화의 총 제작 기간은 어떻게 되나요?
2018년도 2월부터 2년 정도 촬영했어요. 2년 내내 찍은 건 아니고, 학기 중에는 수업 듣고, 방학 때 찍었죠. 그러다 돈 떨어지면 아르바이트도 하고. (웃음) 기간은 긴데 찍은 날은 많지 않아요.
망겜으로 영화 만들어 데뷔한
신인 감독
정식 영화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나요?
그저 졸업작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영화제에서 상 받은 거로도 저는 만족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개봉한다니까 실감이 안 났죠. 넥슨 관계자분들 만났을 때는 이 영화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웃음) 한 번쯤 망상하잖아요? 그랬다가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라고 혼자 생각하고, 감정이 왔다 갔다 했죠.
넥슨과 만남은 어떻게 성사된 건지?
영화제에서 처음 영화가 공개된 후, 기자분들이 홍보를 많이 해주셨어요. 기사를 보고 넥슨에서 먼저 연락이 왔죠. 그후 넥슨과 간담회도 하고, 개발자분도 만나면서 내용이 추가됐어요. 협조도 많이 해주셨죠. 일랜시아 BGM, 영상을 영화 내에서 무료로 이용하게 해주셨어요. 여러 행사에도 초대해주셨고요. 그리고 내용에 대한 터치는 전혀 없었어요. 뭐, 망겜인 건 제가 지어낸 게 아닌 사실이니까… (웃음) 쿨하게 인정하시더라고요.
일랜시아 개발 총괄이었던 정상원 님을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영화를 보신 디스이즈게임의 김재석 기자님이 연결해주셔서 만남이 성사됐어요. 게이머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게임 산업, 업계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죠. 과거와 달리 요즘 게임이 경쟁에 치우치게 된 흐름, 매출과 과금 유도 부분 등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주셨어요. 그날도 많이 배웠죠. 영화 진행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어요.
‘구시대의 잔당’들이
망겜을 못 놓는 이유
현재 버전이 나오기까지 수정이 있었다고 했는데, 처음 기획이 궁금해요.
처음에는 그냥 추억을 회상하는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기획안이 부실해서 교수님들께서 ‘너네 게임하는 걸 남들이 왜 봐야 해?’라고 말씀해주신 적도 있었죠. 그리고 영화를 찍으면서 길드원들을 인터뷰했는데, 막상 추억 때문에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성취감을 게임에서 얻는다는 것이 컸죠.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고 방향을 틀었죠.
영화 속에서 내언니전지’헌’이라는 유저에게 사기를 당한 길드원 이야기가 나와요. 힘들어하다 결국 게임에서 감정을 소모하는 게 싫다고 일랜시아를 접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나, 자아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현실에서는 못하는 게 너무 많아요. 여행을 못 가고 이런 걸 떠나서, 내 속마음도 숨겨야 하죠. 그런 것을 해소하는 곳이 게임이나 익명 커뮤니티인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의 결핍이 모인 곳이죠. 순기능과 역기능이 모두 존재하지만, 게임에서 역할 놀이를 하는 순간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이 되는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떤지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뭔가 움직이고 노력했으면 좋겠고요. 쓸데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여기에 있기에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게임 세계와 현실을 모두 포함하나요?
우리가 일랜시아에서 매크로까지 쓰면서 성취감에 집착하고 있잖아요. 영화에서는 게임을 위해 움직였으니, 이제 현실을 위해 움직여야죠.
일랜시아의 섭종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게임의 존재 조건이 유저인데, 과연 게임이 게임사의 소유가 맞나 하는 궁금증도 생겼고요. 앞으로 일랜시아를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내실 건가요?
목소리를 내고 싶어요. 그런데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요. 단순히 관계자를 만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그들도 사정이 있으니까요. 철저한 준비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영화를 만들며 함께 성장한
감독 박윤진
영화 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이 작품 전에 단편을 찍었어요. 장편 영화를 본격적으로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시작했죠. 다큐멘터리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아 공부를 해야 했어요. 촬영하고 편집하는 것도 시간이 빠듯한데, 공부도 해야 하니까 힘들었죠. 알면 알수록 더 이게 맞는 건가 싶고. 내가 역량이 되지 않는데 일을 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편집하다가 중단하고 공부하고, 다시 촬영하고 편집하고… 배우면서 성장한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제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죠. (웃음)
그리고 영화가 공개되고 기사가 많이 났어요. 일부 유저들은 불안해하더라고요. 괜히 이슈가 되어서 게임이 더 안 좋게 바뀔까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럼 화살이 제게 돌아올 수 있으니까 전전긍긍했어요. 유저를 위해 만든 영화인데,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요. 유저들의 반응이 무엇보다 신경 쓰였죠.
차기작 계획은 있으신가요?
사실 없어요.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고르고 있어요. 영화도 찍고 싶고, 시나리오도 쓰고 싶고, 웹소설도 쓰고 싶고… 사실 다큐멘터리로 입봉했으니 다음 작품도 다큐멘터리를 하는 게 제 커리어에 좋아요. 그런데 다른 하고 싶은 걸 했다가 성과가 안 나올까 봐 걱정이 되죠.
한 번은 게임 기획, 게임 시나리오 직무에 관심이 생겨서 게임 학원에 갔어요. 상담을 받는데, 제 나이도 많고, 좋아하는 게임도 일랜시아라니까 상담하시는 분이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나봐요. 게임 학원은 취업률이 중요하대요. 딱 봐도 저는 취업이 안 될 것 같으니까 만류하시더라고요. 다른 길을 생각해보는 건 어떻냐고. 씁쓸하게 나왔던 기억이 있네요.
그래도 게임이라는 소재는 계속 가지고 갈 거예요. 게임 IP를 이용해 창작을 해보고 싶어요. 게임사가 허락만 한다면, 게임 속 캐릭터들로 영화를 하나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한 게임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랜시아와 배그 캐릭터가 만난다든지… 게임의 요소는 무궁무진하니까 다양한 것을 해보고 싶어요.
되게 진부한 질문 하나 할게요. 감독님께 일랜시아란?
일랜시아는 제게 많은 걸 알려주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한 공간이에요. 일랜시아 안에서는 모든 걸 할 수 있어요. 염색도 하고, 사냥도 하고. 게임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많다 보니, 계속 계획을 세워서 뭔가를 하고 싶어져요. 현실에서는 가능성과 기회비용을 따지게 되는데, 일랜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제가 게임 학원에서 상담받은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라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죠. 그리고 시간을 들여서 노력하면 무조건 피드백이 와요. 렙업이 확실하죠. 이런 확실성이 좋은 것 같아요.
감독이 아닌, 사람 박윤진의 앞으로 목표는 무엇인가요?
영화가 개봉한 후,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어요. 불의를 못 참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더라고요. 사실 저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이제 ‘영화에 나오는 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한순간에 변하진 않지만, 예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살고 싶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고요. 계속 다큐멘터리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어떤 주제를 말할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 노력해야죠.
박윤진 감독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단순 오락으로서의 게임이 아닌, 개인의 삶과 게임에 대해 처음으로 깊게 생각해보게 됐다. 나의 노력의 대가가 명확하게 있고, 시간으로 쌓은 사람과의 신뢰가 있는 공간. 언제부터 우리의 이상이 현실이 아닌 게임 속에 존재하게 된 걸까. 그리고 앞으로 게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까. 망겜을 찾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게임과 사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컬처온]에서 꾸준히 소개할 예정이다.
* 영화진흥위원회가 설립한 인디그라운드(www.indieground.kr)에서 국내 독립·예술영화 70편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고, 현재 「내언니전지현과 나: 디 온택트」는 1/31(일)까지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