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생각과 감정은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됩니다. 간단하게는 말과 글, 표정과 손짓이 있고, 미술과 문학처럼 콘텐츠를 통해 전달되기도 합니다. 기술이 발전하며 등장한 전화,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등 대중매체는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들어와 같은 메시지를 공유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가장 첨단에 서 있는 디지털 게임도 이러한 매체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게임이 다루는 주제가 현실을 모티프로 삼건, 아니면 ‘테트리스’처럼 완전히 추상적이건 간에, 한 편의 게임 안에는 제작자의 의도와 배경이 담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하며 이러한 메시지, 즉 세계관을 받아들입니다.
게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앞선 다른 매체들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게임을 한다고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받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MMORPG ‘테라’에는 중심을 이루는 스토리가 존재하지만, 개별 플레이어들의 모험은 각자의 플레이에 따라 완전히 서로 다른 이야기로 거듭납니다.
게임이 전달하는 세계관은 직선으로 흘러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정한 한도 안에서의 자율성이 부여되어 있죠. 마치 장난감 레고처럼 우리는 블록 조각들을 받아 각자의 이야기를 조립해 갈 뿐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게임이건 세계관은 게임의 중추 역할을 합니다. 훌륭한 세계관으로 칭송받은 게임들이 적지 않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두 개가 아니겠지만, 우선 떠오르는 몇 개를 살펴보죠.
북유럽 신화의 재해석: 갓 오브 워
2018년 오랜 공백을 깨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돌아온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갓 오브 워’의 세계관은 현존하는 북유럽 신화를 완전히 재구성해 독특한 게임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전작에서 그리스 신화 세계의 신들과 맞서 온 주인공 크레토스는 모종의 이유로 북유럽 신화 세계로 이주해 오고, 거기서 아들과 함께 모험에 나섭니다. 게임 속의 많은 적과 인물은 북유럽 신화 속의 인물로 채워집니다.
그러나 ‘갓 오브 워’는 신화를 있는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독창적인 재해석을 통해 신화 원전과는 또 다른 세계관을 창조해냈죠. 게임 속 세계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세계치고는 좁아 보이죠. 하지만 이 공간은 호수의 물이 차고 빠짐을 통해 변형됩니다. 게임 플레이의 진행 공간이 변형되는 셈이죠. 북유럽 신화에서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는, 게임 세계관 속에서 호수를 둘러싼 형태로 등장합니다.
애초에 주인공 캐릭터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설정된 만큼, ‘갓 오브 워’의 신화 세계는 북유럽 신들만의 닫힌 세계가 아닙니다. 다른 여러 신화의 신들과 교류가 가능한 세계로 그려지죠. 게임 속에서 켈트 신화, 이집트 신화 등이 나타난 단서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갓 오브 워’는 온갖 신들이 공존하는 독특한 세계관을 자아내며, 새로 열릴 3부작 시리즈에 대한 기대를 드높였습니다.
세계멸망 이후 다시 일어서는 인류: 호라이즌 제로 던
2017년 ‘호라이즌 제로 던’은 지금의 기술 문명을 가진 인류가 대충 한 번 멸망한 뒤 새롭게 재생되는 세계를 다룹니다. 중세 초기 수준의 기술만을 가지고 있는 인류가 맞서야 하는 것은 매머드나 사자 같은 야수가 아닙니다. 무려 스스로 에너지를 흡수하고 움직이는 기계 괴수들입니다. 알 수 없는 선대 기술에 의해 어딘가에서 계속 재생산되는 기계 괴수들은 마치 80년대 유행했던 완구 ‘조이드’처럼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개체마다 가진 독특한 특성과 디자인을 자랑하며 플레이어에게 완전히 다른 상상력의 세계를 제공합니다.
선대 기술의 유산들이 제대로 해석되기 어려운 멸망 이후의 세계. 그래서 이 세계는 기술이자 마법으로 존재합니다. 홀로렌즈처럼 작동하는 주인공 플레이어의 식별기계는 우리가 보기에는 증강현실이지만, 게임 속 사람들에게는 마법으로 보일 뿐입니다. 기계 괴수를 계속 생산해내는 산속의 자동화 공장은 사실 4차 산업혁명의 일환인 완전 자동화 공장을 은유하지만, 게임 속 세계에서는 ‘가마솥cauldr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마법사의 솥단지 같은 느낌으로 해석됩니다.
미지의 안개 너머를 향하는 탐험: 미스트오버
올해 10월 출시되는 ‘미스트오버’도 현재까지 공개된 정보에 의하면 상당히 독특한 세계관을 자랑합니다. 세계를 갑자기 뒤덮은 재액의 안개는 안개에 노출된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안개 너머에서 쏟아지는 미지의 환수들에 의한 공격으로 왕국은 절멸 직전에 이릅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환수들의 공격이 사라진 순간이 오자, 인류는 마지막 기회로 안개의 중심에 존재하는 절망의 기둥을 탐험하고 분석할 조사대를 꾸려 생존을 도모합니다.
대부분의 롤플레잉 게임들은 중세를 모티프로 변형한 판타지 세계에 안일하게 머물러 있어 비판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미스트오버’는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처럼 음울한 배경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발랄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되는 ‘미스트오버’. 올 10월에 어떤 세계를 우리의 상상력 앞에 제공하게 될까요?
이경혁 게임 칼럼니스트 grolmars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