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 나쁜 놈!’에 공감하면서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느낀다. 보면 볼수록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되는 게임 속 악당 캐릭터도 있다. 주인공이 착한 데에는 이유가 없지만, 흑화된 악당들은 저마다의 이유와 탄탄한 스토리가 있기에 훨씬 흥미롭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사연으로 악당이 된 게임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많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썩씨딩 유 파더, 워크래프트 ‘아서스 메네실’
사람들은 조커를 보며 말했다. 원래 착했던 사람이 미치면 더 무섭다고. 패륜의 대명사 ‘아서스 메네실’도 착했다가 미친 캐릭터로 유명하다. 그는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2대 리치 왕(The Lich King)이자 스컬지(언데드 세력)의 수장이지만, 태생은 인간 국가 ‘로데론’의 왕자님이었다.
이때의 아서스 메네실은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인물이었다. 뛰어난 성기자로 국가에 헌신하면서도 백성을 위할 줄 아는 따뜻한 인격 덕에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대마법사 ‘컬투자드’가 역병을 퍼트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최전선에 서서 스컬지를 물리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백성들이 역병에 감염되었거나 감염될 위험에 처해있었고, 아서스 메네실은 도시 전체를 불태우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아직 멀쩡한 백성들도 있었기 때문에 ‘정화’라는 명목으로 ‘학살’을 행했다는 동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때의 독선적인 행동으로 동료를 잃은 아서스 메네실은 자신의 백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미쳐간다.
이후, 아서스 메네실은 역병을 지휘한 공포의 군주 ‘말가니스’를 쫓아 노스렌드(Northrend, 워크래프트 시리즈에 등장하는 지명)까지 갔지만, 말가니스를 쓰러트리기에는 본인의 힘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사용자에게 영원한 힘을 주지만 영혼을 빼앗아 리치왕의 노예로 만드는 저주받은 검 ‘서리한’을 욕심낸다. 백성들의 복수를 위해 서리한을 뽑아 든 아서스 메네실은 말가니스를 물리치지만, 이미 영혼은 흑화 완료된 상태. 죽음의 기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죽이며 그 유명한 명대사를 날린다. ‘Succeeding you, Father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결국, ‘공인 후레자식’으로 게이머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나쁜 놈 잡으려다 더 나쁜 놈이 된 아서스 메네실. 잘못된 방법이었지만, 백성을 위해 복수를 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본 있는 악당이라 할 수 있다.
인생 자체가 레게노, 메이플스토리 ‘반 레온’
‘메이플스토리’의 빌런 ‘검은 마법사’는 수많은 군단장을 데리고 있다.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라는 말처럼 당연히 나쁜 놈 친구는 나쁜 놈인데, ‘반 레온’은 그냥 나쁘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사자왕’이라 불리는 반 레온은 과거 엘나스 산맥(메이플스토리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오시리아 대륙 최상단에 위치)이라는 척박한 땅에 세워진 왕국의 왕이었다. 반 레온의 왕국은 워낙 척박해서 물질적인 여유는 없었지만 행복한 왕국이었다고 묘사된다. 반 레온은 ‘모든 엘나스 사내들의 귀감’이라 할 정도로 실력 좋은 검사인 동시에, 좋은 국왕이었고, 왕비에게 다정한 사랑꾼이었다.
하지만, 메이플 세계의 종말을 목적으로 하는 검은 마법사가 오시리아 대륙까지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전쟁이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반 레온은 자신의 왕국은 안전할 거라 믿었다. 왕국이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쳐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반 레온의 왕국을 먼저 찾은 건 검은 마법사가 아니라, 검은 마법사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반 검은 마법사 동맹’이었다.
동맹은 반 레온에게 검은 마법사에 함께 맞설 것을 요청했지만, 반 레온은 검은 마법사와 자신의 왕국과는 관련이 없고, 척박한 땅에서는 병사 한 명이 중요하다며 동맹을 거절한다. 동맹은 반 레온의 거절에 분노하며 검은 마법사에 맞서지 않는 건 검은 마법사와 한패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앞세워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물론, 나쁜 놈에 대한 침묵은 동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 마법사 동맹은 선을 넘는다. 반 레온이 다시 동맹을 설득하기 위해 왕국을 비운 틈을 타, 병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왕비까지 모두 학살한 것. 뒤늦게 돌아온 반 레온은 큰 충격을 받고, 동맹에 복수하기 위해 검은 마법사의 부하가 된다. 반 레온의 백성들에게는 반 마법사 동맹이 악이기 때문에, 세상에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없다는 걸 보여주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다음 번에는 도망 안 갈게요, 파 크라이 ‘페이건 민’
부하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상사는 자기 자식에게도 나쁜 부모일까? 적어도 우리 폐하는 아니다. ‘파 크라이’의 ‘키라트’(파 크리아에 등장하는 가상의 국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를 지배하고 있는 독재자 ‘페이건 민’은 게임 초반부터 대단한 똘끼를 보여준다. 게임 시작 직후 등장해서 자신의 지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면서 만년필로 부하의 목을 수차례 찔러 죽이고, ‘젠장, 신발에 피가 튀었잖아!’라고 말한다.
이 또라이와 엮이면 절대 안 된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그러나 더 무서운 건 주인공 ‘에이제이’를 따듯하게 반겨준다는 점. 따듯하게 포옹해 주며 왕궁에서 함께 식사까지 한다. 미친놈이 잘해주는 게 제일 위험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게이머는 페이건 민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왕궁을 탈출하는 걸 선택한다. (이때 왕궁을 탈출하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되지 않고 히든 엔딩으로 넘어간다.) 이후에는 주인공이 ‘골든 패스’ 편에 서서 페이건 민의 ‘왕실군’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하지만 엔딩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 반전은 페이건 민은 사실 주인공 에이제이의 양아버지고, 진심으로 잘해주려 했다는 것. 과거, 에이제이의 엄마인 ‘이시와리’는 에이제이를 출산한 직후 골든 패스의 초대 수장이자 남편인 ‘모한’에 의해 페이건 민에게 보내진다. 일종의 미인계를 쓰려던 셈인데, 둘은 진짜 사랑에 빠져버리고 딸까지 출산한다.
이에 분노한 모한은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죽이고, 이시와리는 에이제이를 데리고 떠나버린다. 페이건 민에게 에이제이는 원수의 아들인 셈이지만, 애정으로 보듬고 그에게 자신의 왕국까지 물려주려는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게임 초반에 부하를 잔인하게 죽인 것도 자기 아들을 해칠 뻔했기 때문. 멋모르는 양아들이 왕국을 때려 부수고 다녔지만, 그것도 이해하고 넘어가는 그저 빛 페이건 민. 엔딩을 보고 나서 ‘왕실군’ 편에 서서 다시 한번 플레이하고 싶다는 게이머들이 많을 정도로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악당이다.
차원이 다른 출생의 비밀, 파이널판타지 ‘세피로스’
증오가 가득 찬 눈빛으로 불길 사이로 사라지는 유명한 장면의 주인공 세피로스, 파이널판타지의 히로인 ‘에이리스’를 죽여서 플레이어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지만, 알고 보면 나름의 비극적인 사연을 갖고 있다. ‘세피르스’는 지금까지 소개한 악당들과는 그 뿌리부터 다르다. K-일일드라마 뺨치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기 전 세피로스는 ‘희대의 영웅’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라 컴퍼니'(파이널 판타지에 등장하는 가상의 기업, 세계를 장악한 거대한 기업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의 정예 병사인 ‘솔저’로서 수많은 활약을 했다. 동료인 ‘제네시스’, ‘앤질’과 허물없이 지낼 정도로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실 수정란일 때부터 ‘제노바(극한의 모방 능력과 잔혹함을 겸비하고 있는 외계 생명체)’의 세포를 주입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세피로스는 그동안 어머니의 이름이 ‘제노바’이며, 본인을 낳자마자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에 절망한다. 출생의 비밀 분야는 우리나라 드라마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여기는 아예 종족이 달라져 버리니, 졌다 졌어. 이후 세피로스는 제노바를 찾아가 ‘어머니’라 부르고, 자신을 만든 신라 컴퍼니와 인류를 향한 끝없는 증오심에 휩싸여 타락한다. 세피로스는 비록 악당이지만 팬층이 두꺼운 인물로도 유명하다.
게임을 하다 보면 캐릭터와 정이 든다. 조금씩 내적 친분을 쌓다 보면 어느새 내 친구 같아지는 게임 캐릭터들. 그러다 보니 스토리 있는 악당 캐릭터는 괜히 안타깝고 정감 가기도 한다. [컬처온]은 앞으로도 게임 속 세계관을 빈틈없이 채우는 다양한 캐릭터를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