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회사 사람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피플온] 시리즈에서는 크래프톤 직원들의 이모저모를 낱낱이 살핀다. 이번에는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를 찾아갔다.
영화와 드라마에 작가가 있다면 게임에는 시나리오 라이터가 있다. 게임의 필수 요소인 세계관과 스토리, 그리고 캐릭터 설정 등 게임의 전반적인 걸 기획하는 사람.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는 어떻게 일할까? 소설이나 시나리오 작업 등의 부업을 할까? 캐릭터 작명은 어떻게? 현실 vs. 게임 속 세계,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정태섭, 유재선을 만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유: 저는 테라(TERA) GT실 콘텐츠팀에서 시나리오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유재선입니다. 작년 6월경에 결성된 테라 프로젝트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정: 저는 AIMO팀에서 콘솔 프로젝트인 미스트오버(MISTOVER)의 모든 시나리오 및 콘텐츠를 담당하고 있는 정태섭입니다.
시나리오 라이터, 어떤 일을 하나요?
정: 폭이 넓어요. 쉽게 말해 게임의 세계관을 만들거나 대사를 쓰는 일 등을 하죠. 저 같은 경우는 전체적인 콘텐츠, 캐릭터 이름부터 시작해서 아이템, 텍스트로 전달되는 모든 것에 관여합니다.
유: 회사나 부서마다 다르긴 하지만 비슷하네요. 저는 레벨 디자인도 같이하고 있어요. 레벨 디자인은 게임의 시각적인 것들, 이를테면 지도나 몬스터, 게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단계적으로 기획하는 걸 말해요.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라이터’보다는 ‘기획자’에 가깝죠.
정: 보통 시나리오 라이팅 외에 다른 업무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정말 큰 프로젝트에서 MMORPG를 만들 때는 정말 시나리오 라이팅만 하는 분도 계시다고 하더라고요.
게임 개발 초기 단계부터 게임 론칭까지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정: 먼저 PD님이 게임의 시스템 콘셉트를 정해요. 그럼 거기에 맞춰서 ‘이런 분위기, 이런 방향성으로 나가면 좋겠다’고 회의하죠. 방향이 결정되면 영화나 드라마처럼 A4용지 한 장 분량의 짧은 시나리오를 쓰고, 그걸 확장하는 작업을 해요. 세계관, 캐릭터가 잡히면 그것을 토대로 다른 팀과 협업을 해서 어떤 유형의 캐릭터, 몬스터를 만들지 계속 살을 붙여요. 시나리오 대사를 쓰고, 버그가 있으면 수정하는 작업도 하죠.
게임이 다 완성이 돼서 론칭한 뒤에도 바쁜가요?
유: 세계관, 인물 설정 대부분은 개발 초기에 정해져요. 거기서 크게 바뀌지 않아요. 주 업무는 퀘스트 업무에요. 메인뿐만 아니라 서브 퀘스트도 있고 그 외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지죠. 이런 모든 것들이 최소한의 시나리오를 필요로 해요. 유저들이 조금이라도 어색한 부분을 발견하면 게임 몰입도가 떨어지거든요. 끊임없이 검수하는 게 시나리오 라이팅을 맡은 기획자의 역할입니다. 론칭하고 나서도 보여요. 개발 단계에선 ‘시나리오 앞뒤 다 맞고 퀘스트도 잘 되고 버그도 없고 완벽하다!’ 했는데 유저들이 ‘이거 안 돼요’ 하면 또 수정해야 해요. 끝이 없어요. 어디서 뭐가 발생할지 모르는 직무라(웃음).
두 분 다 평소에도 글을 쓰시나요?
유: 저는 문예창작과를 나왔어요. 평소에도 꾸준히 쓰는 편이에요. 저는 굉장히 상업적입니다(웃음). 시장에서 쳐주는 만큼 써요. 학창 시절에도 “너는 참 상업적으로 쓰는구나!”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글에 인간의 내면이나 고뇌, 사회적인 걸 담아내려고 했다면 저는 ‘음, 저렇게 쓰면 돈이 안 되겠지? 이렇게 써야 팔리겠지?’ 하면서 글을 썼어요.
정: 잘 쓰는지는 모르겠어요. 인터넷에 글을 올리거나 친구들에게 글을 보여줬을 때 재미있다는 반응이 좋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거든요. 저는 게이머나 제 또래가 봤을 때 어렵지 않고 쉽게 읽혔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웹사이트에 익명으로 웹 투고를 하고 있어요. 장르는 판타지 소설인데 크게 인기는 없어요(웃음).
나중에 한 번 찾아서 보고 싶네요. 시나리오 라이터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유: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서사를 논리적으로 몰입감 있게 쓰는 건 기본으로 잘해야겠죠. 무엇보다 기획력이 중요할 것 같아요. 게임 회사에서 바라는 포트폴리오는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그 시나리오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까지 덧붙여야 하거든요.
정: 정도가 없어요. 커리큘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과정을 거치면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가 된다는 보장도 없거든요. 저는 ‘글 잘 쓰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어요.
그럼 포트폴리오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채용 과정에서 글쓰기 시험이나 과제가 있어요?
정: 면접, 시험 비슷한 느낌의 숙제가 있을 수 있어요. 자신의 문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죠. 유: 저는 시험으로 입사했는데, 일반적인 전투력 공식과 수학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2개,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는 MMORPG의 장점, 게임에 대한 신념’처럼 개인의 철학을 묻는 문제가 2개 나왔어요. 앞의 두 문제는 게임 기획 소양을 묻는 문제였고, 뒤의 두 문제는 ‘이 사람이 논리적으로 자기 의견을 펼칠 수 있는가’를 보는 문제였던 것 같아요. 포트폴리오로는 ‘특정 게임의 시나리오를 보강하려면 이런 식의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냈어요.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와 영화&드라마, 소설 작가와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유: 드라마나 영화는 모든 사건이 일방적으로 전달돼요. 화자가 모르는 곳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게 모든 시나리오에 영향을 끼쳐요. 하지만 게임은 유저의 개입이 없으면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시간도 흘러가지 않아요. 플레이어가 전장 한복판에서 가만히 몇 시간이고 서 있으면 내용이 흘러가지 않죠. 반면에 영화는 재생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흘러가죠.
듣고 보니 그렇군요.
유: 영화는 복잡한 상황을 내래이션이나 자막으로 넣곤 하지만 게임은 달라요. 플레이어가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텍스트나 영상으로 보여주면 시나리오는 힘을 잃어요. 내가 직접 움직이고 결투해서 보스를 죽이는 것과 화면에 “한 대 쳤더니 몬스터가 죽었다”라고 자막이 뜨는 건 체감하는 게 다르죠.
게임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이 궁금해요.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해준다면?
유: 하나의 주제를 정해요. 메인 퀘스트의 마지막을 볼 때까지 어떤 주제를 관통할지 생각하고 그것에 맞춰 쓰려는 편이에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생각하고 그 주제에 맞게 배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정: 재미있는 소재를 잡고 거기서 확장하기도 하지만, ‘캐릭터 A와 B가 부딪혔을 때 어떤 이야기가 발생할까?’ 먼저 생각해서 가지를 뻗어 나가기도 해요. 상황에 따라 다양해요.
세계관을 설정하고 인물을 설정할 때 감정 이입하는 캐릭터가 있을 것 같아요. 캐릭터 중에 직장 상사나 전 애인을 넣기도 하나요?
유: 저는 웬만하면 주변 사람을 안 넣으려고 해요. 결국은 들키거든요. 그게 싫어요(웃음).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 상이 있어요. 어두운 배경을 가진 우울하고 상처가 많은 캐릭터.
그래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데, 어느 순간 회개하고 장렬하게 사망하는 캐릭터를 좋아해요.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반지의 제왕」의 골룸. 골룸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잖아요. 근데 마지막 행동이 세계를 구하죠. 뭔가 배신하고 통수 치는 그런 캐릭터가 매력 있어요.
정: 저는 만화를 좋아해요. 밝고 개그가 많은 걸 좋아하거든요. 예전에 「포켓원정대」라는 모바일 게임 개발에 참여했는데, 상황에 맞지 않는 이상한 개그를 많이 하는 캐릭터를 넣었어요.
실제 게임이 나왔을 때, 처음 내가 제시한 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나요? 아예 다를 수도 있어요?
정: 상황별로 다르지만 100% 다르게 나올 때도 있어요. 사람마다 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럴 경우에 부탁하고 사정하는 편입니까? 우겨서 쟁취하는 편입니까?
정: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좋은 그림이 나올 때도 있어요. 보통 그대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요.
유: 저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었어요. 근데 기획한 부분과 다르면 부딪혀서, 아니 사정을 해서라도 다시 만들어달라고 해야겠죠. 퀄리티의 차이는 있어도 방향의 차이가 있으면 안 되니까요.
부탁할 때 뇌물이라도 사서 가야겠죠?
유: 정말 무리한 부탁을 할 때는 크래프톤 타워 15층(사내 카페)이 아닌 옆 건물 스타벅스로 갑니다(웃음). 부탁이 무리해질수록 가격이 올라갑니다. 아직 고기까지 산 적은 없지만 한계는 없어요. (웃음) 커피로 퉁칠 수 없는, 진짜 작업하는데 오래 걸리는 건은 팀장님과 상의해서 작업 여부를 결정해야겠지요.
영화는 열린 결말을 두거나 이스터에그를 일부러 심어 두기도 해요. 게임 세계관을 구성할 때도 일부러 유저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포인트를 두나요?
정: 저는 많이 애용해요. 가벼운 분위기의 게임에서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드립 같은 걸 많이 넣었어요. 이를테면 드라마 「야인시대」의 “4달라!”라던가 “내가 고자라니!” 같은 것들이요(웃음). 유저들도 좋아하더라고요. 애니메이션의 유명한 대사를 인용한 적도 있는데 유저들이 귀신같이 찾아내서 위키에 올리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부업으로 다른 걸 하는 사람도 있어요?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등의 활동도 충분히 가능해 보여요.
유: 저희 PD님은 신춘문예에 두 번 등단하셨고 등단 전에 본인 책도 내셨다고 해요. 게임 PD로서도 경험이 있으시니, 아마 지금도 부업으로 무언가를 하신다면 충분히 잘 하실 거예요. 근데 저희 회사는 겸업이 금지되어 있어서 아마(웃음)…
정: 취미로 유튜브 하시는 분들은 종종 있더라고요.
게임 속 세계는 판타지에 가까워요. 평소 좋아하는 판타지물이 있나요?
정: 저는 「로도스도 전기」. 전설적인 소설과 애니메이션이죠. 모험물을 좋아하는데 각각의 캐릭터가 살아있어서 좋아요. 주인공이 역경을 이기고 강해지는 내용이 좋아서. 사실 그냥 히로인이 좋습니다(웃음).
유: 저는 「반지의 제왕」요. 그 이상의 연대기적인 소설은 없어요. 사실 장르는 거의 가리지 않아요. SF, 심령물, 공포물 등 현실에 없는 걸 판타지라고 하잖아요.
캐릭터, 아이템 작명할 때는 어디서 영감을 얻나요?
유: 구글! 캐릭터 아이템 작명 사이트가 있어요(웃음). 세상이 정말 좋아졌죠. 평소 생각하는 이름으로 할 때도 있고 제가 좋아한 게임이나 다른 작품 패러디도 많이 하는데 정말 막힐 때는 구글을 애용합니다. 물론 그대로 쓰지는 않고 변형을 좀 하죠.
정: 귀찮을 때는 특정 분야를 통으로 활용할 때도 있어요. 예전에는 빵 이름을 쓰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쇼콜라’나 ‘바게트’ 같은 거죠. 어떤 분들은 총기 메이커 이름을 넣기도 하더라고요.
세계관, 캐릭터, 아이템 중에 ‘내가 만들었지만 이건 좀 쩔었다’ 싶은 게 있어요?
유: 저는 아직 없어요. ‘이건 좀 쩔었다’ 싶은 걸 만들고 싶은 단계죠.
정: ‘배틀그라운드’처럼 몇천 만 장 팔고 나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 대사는 좀 웃겼어” 댓글을 봤을 때 뿌듯하긴 하더라고요.
현실 vs. 게임 속 세계,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유: 지금 작업하고 있는 그 세계요? 거긴 하루걸러 하루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요. 저는 책상에 앉아서 몸 편하게 있고 싶어요.
정: 일단 「미스트오버」는 죽는 게 포인트라 가고 싶지 않네요(웃음). 죽을 확률이 높죠. 저는 현대 세계 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누리고 싶어요. 이 도시의 안락이 좋아요.
유: 현실에 있어야 또 다른 게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꼭 한번 살고 싶은 세계가 있어요?
정: 통일된 대한민국(웃음)?
유: 현실이 더 좋긴 하지만, 저는 제가 작업하고 있는 게임 「테라」의 세계에 한 번은 살아보고 싶네요. 제가 만든 캐릭터가 사니까요. 연예인 만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게임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물론이고 세계관, 캐릭터 설정, 인물의 대사 하나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인다는 시나리오 라이터. 인터뷰 내용처럼 단순한 ‘라이터’가 아닌, ‘기획자’에 가까운 이들. 그들이 구축할 다음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앞으로도 수많은 노력들을 [피플온]에서 밀착 취재할 예정이다.
에디터 클토니: 게임 좋아해요. 게임 회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장인정신 넘치는 게임 유니온, 크래프톤 직원들을 탈탈 털어보려 합니다. 자칭 크래프톤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