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누구나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문화 콘텐츠로 성장해 왔습니다.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보다 긍정적이고 유의미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크래프톤은 게임 본연의 재미와, 게임과 사회 상호간의 영향력을 보다 깊게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과 함께 게임 문화 연구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생각을 모아 연재 형식으로 전해드립니다.
비디오 게임이나 PC 게임(패키지/온라인)은 게임을 공적 공간인 전자오락실[1]에서 사적 공간인 집으로 이동시켰다. 1990년대 후반 플스방(플레이스테이션방)과 PC방이 등장하기 전까지 비디오 게임과 PC게임은 집에서 플레이됐다.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의 이동은 게임이 가동되는 하드웨어의 사유화가 가능해진 데서 기인한다.
초기(1980년대 초반) 한국의 비디오 게임 및 PC 게임 문화는 상당히 독특했다. 우선, 자생적으로 형성됐음에도 해외(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이식된 문화[2]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음으로,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이었음에도 집에서, 그것도 많은 비용이 드는 게임을 가족의 상대적으로 적은 반대 속에서 플레이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플레이어들은 (최소) 경제자본, 그리고 (나아가) 문화자본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비디오 · PC 게임 경험은, 오늘날 다른 어떤 문화 콘텐트 이용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상대적으로 공부를 못하거나 사회와 부모로부터 소외된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빈번하게 취급되는 현재의 (특히 온라인) 게임 경험과 대비되는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요즘의 게임기 및 소프트웨어가 갈수록 물리적 형태를 취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형태만 취하려는 경향을 띠는 반면, 당시의 게임기와 소프트웨어는 물리적 형태를 뚜렷이 취함에 따라 게임 소유에 대한 인식 또한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비디오 · PC 게임 경험은, 둘의 유행 이전부터 인기를 끌었던 아케이드 게임 경험과도 구분된다. 아케이드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훨씬 부정적이었다. 우선, 아케이드 게임 시장이 합법적으로 시작되질 못했다. 전자오락실의 공간적 특징도 아케이드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 형성에 한몫 했다. 전자오락실 밖 간판에는 ‘지능개발[3]’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진짜 지능을 계발하는 장소라면 내부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보여줘야 하는데, 전자오락실 전면 유리창은 대부분 진하게 코팅돼 있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는 힘들었다.[4]
이러한 폐쇄성으로 인해 아케이드게임을 하러 가는 행위는 마치 금지된 곳에 출입하는 은밀한 행위인 것처럼 인식됐다. 당시 전자오락실이 주로 청소년들이 모이는 공간이었음을 감안하면, 폐쇄성은 청소년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한국의 전자오락실은 관리의 대상으로, 문화적인 공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 전자오락실 관련 정부 주무부처는 보건사회부(現 보건복지부)였는데, 이는 전자오락/실이 육체적 · 정신적으로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5]이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초기, 즉 1980~90년대 비디오 · PC 게임 문화를 경험한 플레이어와 이후에 그것들을 경험한 플레이어 또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제 비디오 · PC 게임 플레이어들은 반드시 집만이 아니라, 플스방 · PC방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즐긴다. 요즘의 플레이어들은 애초에 집에서, 그리고 플스방과 PC방에서 선택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었던 세대다. 물론 1980~90년대 플레이어들에 비해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게임을 할 수 있다. 반면, 1980~90년대 플레이어들의 경우, 플스방이나 PC방에서의 경험 역시 반드시 갖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집에서만 비디오 · PC게임을 즐겼던 1980~90년대 플레이어들의 경험은 꽤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집에서의 경험은 사적인 것으로, 플스방, PC방 등에서와 같이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6]
이처럼 초기 비디오 · PC게임 플레이/어는 플랫폼, 시대, 장소 차원에서 하나의 독특한 경계를 형성한다. 지금의 게임 플레이/어와는 완전히 구분되면서, 소수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이 사적인 것이어서 직접 그들에게 묻지 않으면 그것의 구체적인 양상과 의미에 대해 알 수가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만약 초기 비디오 · PC게임 플레이/어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했을 때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문화가 한국 게임 역사에서 완전히 독립된 것이 아니라 전체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는 데 있다.
우선, 그 그룹에 속하는 많은 인원들이 한국 (온라인)게임산업의 초석을 다지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한국의 주요 게임회사 CEO, 게임개발자, 그밖의 게임산업 종사자 중 그 그룹(1980~90년대 비디오 · PC게임 플레이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그들에게 당시의 플레이 경험은 단순히 여가를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직업으로 삼고 산업화하는 수준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성공한 게임회사 CEO, 게임개발자, 그 밖의 게임산업 종사자들에 대한 기존 담론은 그들의 성장배경, 문화자본 등을 맥락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그들의 열정과 노력을 강조하는 통속적 서사물로서 그들의 성공을 게임의 사회적 · 문화적 맥락에서 떼내고, 사회 전반의 지배적 가치들을 받아들이면서 신화화할 뿐이다.[7]
이에 초기 비디오 · PC게임 플레이/어 연구를 통해 당시 플레이 경험이 현재의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연결고리를 작게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꼭 현재 게임산업에 몸담고 있지 않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당시의 경험은 그들이 현재 학부모로서 아이들의 게임 플레이에 대해 갖는 인식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만약 당시의 경험이 현재 (자신에 대한 것이든, 가족에 대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것이든) 게임 플레이에 대한 인식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그 또한 일생사에서 게임 경험이 구축(일치, 연속)되고 탈구축(불일치, 단절)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 한국의 게임 역사 연구가 대체로 그 틀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이제야 거시사 차원에서 조금씩 논의가 진전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연구를 통해 미시사 차원의 게임 역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강신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 미디어광고연구소 연구위원. 방송, 디지털 게임,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GSOK) 게임광고자율규제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게임 관련 저서로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 게임까지>(공저, 2019),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논문으로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메타/게임으로서의 ’게임보기’: 전자오락 구경부터 인터넷 게임방송 시청까지’(공저, 2019) 등이 있다.
[1]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로, ‘아케이드게임장’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게임센터(ゲームセンター)’, 미국에서는 ‘어뮤즈먼트 아케이드(Amusement Arcade)’라 지칭하기도 한다(전홍식, 2012). 전자 오락실의 태동과 변천. 윤형섭 외, <한국 게임의 역사> (114∼126쪽)
[2] 김득렬 (2011. 12. 29). 게임잡지 연대기 1부: 게임월드부터 게임매거진까지. <게임메카>. URL: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125133
[3] 현재는 ‘계발’이 표준어이나, 당시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4] 허준석 (2008). 오래된 기억: 전자오락실의 미친 열정은 온라인에서도 지속되는가. 박용귀 등,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
[5] Ibid.
[6] 강신규 · 원용진 · 채다희 (2019). 메타/게임으로서의 ‘게임 보기’: 전자오락 구경부터 인터넷 게임방송 시청까지. <한국방송학보>, 33권 1호, 5~43쪽.
[7] 방희경 · 원용진 · 김진영 (2018). 게임담론 지형 내 대중담론의 위치: 게임 생산자 전기물(biography) 분석을 기반으로. <한국언론정보학보> 88호, 4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