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AFTON

꿈도 희망도 없는 게임 속 디스토피아

“이번 생은 망했다.”

자조 섞인 ‘이생망’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자리 잡은 시대입니다. 세계 경제는 불확실성 속에 침체 됐고, 한국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새로운 전염병과 가짜뉴스는 세상을 ‘혼돈의 카오스’로 빠트리곤 합니다.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미래를 저당 잡힌 채 현재를 하루하루 버텨냅니다.

하지만 ‘이생망’은 오늘날의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황금기로 부르는 시기의 사람들도 ‘이생망’을 외치며 과거의 향수를 그리는 모습을 옛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부는 원시시대를 이상향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또 일부는 현실의 불안을 투영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죠.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이 대표적입니다.

게임에도 ‘이생망’이 펼쳐집니다. 개인을 억압하고 감시하는 디스토피아적 ‘파놉티콘’부터 핵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인류가 멸망 직전에 이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까지 참담한 풍경이 그려집니다. 온갖 역경을 겪는 주인공을 조작하다 보면 다시금 우리네 삶을 생각하게 되죠. 엄밀히 따지면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는 다르지만, ‘이생망’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럼 우리 현생과 게임 속 삶의 교차점을 한번 살펴볼까요.

폴아웃 시리즈

‘폴아웃’ 시리즈는 핵전쟁 이후 방사능으로 뒤덮인 세상을 다룹니다. ‘폴아웃’이라는 제목 자체도 방사능 낙진을 의미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종식되지 않은 평행세계를 배경으로 게임이 전개되는데요. 자원 고갈로 핵전쟁이 벌어져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류의 모습을 그립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RPG로, 무한한 자유도와 수많은 퀘스트가 특징입니다. 정해진 줄기대로 따라가는 선형적 RPG와 달리 캐릭터를 어떻게 육성하느냐에 따라 전투 위주로 플레이할 수도 있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폴아웃 76’이 그리는 핵전쟁 후 모습. (이미지 출처: 베데스다)

1997년 시작된 시리즈는 2018년 ‘폴아웃 76’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게임 내 표현되는 문화적 토양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핵무기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1950년대 미국에 기반을 둡니다. ‘전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주제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합니다.

비슷하게 핵전쟁과 방사능 낙진 이후의 세계를 그린 게임으로 FPS 장르 ‘메트로’ 시리즈가 꼽힙니다. 국내에서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살아남는 생존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서울 2033’이 인디게임 씬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전염병 주식회사

핵전쟁과 더불어 인류를 위협하는 주된 요소로 전염병이 꼽힙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질병에서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지만, 국경이 허물어지며 기존의 약으로는 듣지 않는 다양한 신종 전염병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죠. 2015년 ‘메르스’에 이어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국내에서도 발생하면서 전염병에 대한 경각심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역주행하고 있는 게임도 있는데요, 바로 ‘전염병 주식회사(Plague Inc.)’입니다.

‘전염병 주식회사’에서 전염병 확산 모습 (이미지 출처: 게임 스크린샷)

‘전염병 주식회사’는 질병을 퍼뜨려 인류를 멸종시키는 내용의 모바일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신약 개발과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인류애가 생기는 게임이기도 하죠. 물론 게임의 목적은 인류 멸망이어서 죄책감과 즐거움을 동반한 ‘길티플레져’를 느끼게 합니다.

특히, 가축이나 조류, 대기 중 전파 등 게임 내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이 제법 현실 세계와 닮아 있어 최근 더욱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엮여 관심이 쏟아지자 개발사인 엔데믹 크리에이션은 게임은 게임일 뿐이며, 세계 보건 당국의 정보에 귀 기울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엔딩이 바뀌는 인터랙티브 드라마 게임으로 화제를 모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도 만만치 않은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합니다. 인간형 로봇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된 2038년을 배경으로,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대립을 그립니다.

작중에서 그려지는 미래에는 현실에서 대두하고 있는 AI로 인한 실업 문제, 자율주행차 사고 문제 등 극단적 사례가 반영돼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 미국 정부는 안드로이드로 인한 높은 실업률을 외면합니다. 자율주행차는 사고 발생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희생시키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죠.

인간형 로봇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대립을 다룬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이미지 출처: 소니인터랙티브엔터테인먼트)

이 같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플레이어는 인간과 안드로이드 간의 평화의 길로 갈 건지, 폭력적 대립의 길로 갈 건지 선택하게 됩니다. 이 선택 과정에서 오는 몰입이 탁월해 조작 요소는 적고 게임 대부분이 많은 컷씬으로 채워져 있지만, 평단과 이용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심시티 시리즈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의 고전 ‘심시티’ 시리즈는 이용자의 플레이에 따라 도시가 어떻게 지옥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가 직접 시장이 돼 도시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내용인데요, 현실의 집값 문제, 슬럼가, 쓰레기, 에너지 문제 등이 게임 내에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아예 재난을 일으켜 도시를 파괴하는 방식의 플레이도 가능합니다.

디스토피아를 선택할 수 있는 ‘심시티: 미래도시’ (이미지 출처: EA)

2013년에 출시된 ‘심시티’의 확장팩 ‘심시티: 미래도시’는 이 같은 플레이를 극대화했는데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도시는 유토피아가 되거나 디스토피아가 됩니다. 디스토피아형 미래를 선택했을 때 손잡게 되는 ‘오메가 Co.’는 시민을 오메가라는 물질에 중독시켜 자사의 상품 구매를 강요하고 권력을 차지하는 독점 자본형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데스 스트랜딩

‘메탈기어’ 시리즈로 유명한 코지마 히데오의 복귀작 ‘데스 스트랜딩’은 독특한 게임성과 세계관으로 게임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으로 꼽힙니다. 지난해 출시된 이 게임은 이른바 ‘쿠팡맨’ 체험 게임으로 불리며, 이용자들 사이에서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렸는데요. 생사의 경계가 무너진 파괴된 인류 문명을 배경으로, 고립된 채 살아가는 개인들을 연결해주는 택배 기사의 감동 실화(?)를 담았습니다.

2019년 코지마 히데오의 문제작 ‘데스 스트랜딩’ (이미지 출처: 소니인터랙티브엔터테인먼트)

‘데스 스트랜딩’은 오픈월드를 바탕으로 시간을 가속시키는 비 ‘타임폴’, BT라 불리는 그림자 괴물, 택배 도둑 ‘뮬’, 테러리스트 등을 피해 물건을 배달하는 플레이를 기본으로 합니다.

전투 위주의 일반적인 오픈월드 게임과 달리 배달이 주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오는 독특함에 젖어들 수도, 전혀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어 평가가 크게 갈렸습니다. 또 컷씬 위주의 구성 때문에 게임 같지 않다는 평가도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2019년 최다 ‘올해의 게임(GOTY)’을 수상하는 등 지난 한 해를 뜨겁게 달군 게임임에는 분명합니다.

현실에 근간을 둔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은 역설적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류는 ‘이생망’을 외치며 불안감을 동력으로 조금씩 진보해나가는 건 아닐까요? 미래를 불안해하는 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게임 속 ‘이생망’은 현생을 반추하게 하며, 다시금 우리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합니다.

이기범 블로터 기자 spirittiger@bloter.net